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글루스 | 로그인  


태그 : 아다기아

아, 참, 좀 늦었지만, 책 두 권이 보름 전에 나왔습니다.



책 나온 것에 대해 말씀 올린다 올린다 하고있다가 깜빡했네요.
실은 책 나온지 보름이 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책들아 미안해). 이제 약간이나
마 정신을 차려, 책들이, 두 권, 잘 태어났다고 말씀드립니다.  .


하나는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피렌체 편>이란 제목으로 나왔
고, 반응도 괜찮습니다. 한겨레 서평은 - <여기 클릭>해 주세요.
아시다시피, <팝툰>에 연재하던 '르네상스 탐정 바사리'를 바탕
으로, 1년 동안 더 작업한 만화입니다. 새로 그린 부분 많습니다.


다른하나는 '일러스트'로 참여한 책인데요 <에라스무스 격언집>
입니다.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이 라틴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시
고, 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이 번역을 바탕으
로 현재 한겨레신문에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칼럼에 글과 그림
을 기고하고 있습니다(저로서는 과분한 기회이지요). 책소개는요
한겨레는 <이 기사>의 두번째 항목을, 연합 서평은 <여기>를 읽
어주세요. 감사합니다.                                                       .


사실 책이 오랜만에 나오는 것이라 마냥 즐거웠어야 하는데, 시국
이 시국인지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왠지 무안해서 울고 싶지 않았
는데, 솔직히 눈물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습니다. 책이 나온 기쁨
이 노무현대통령 서거로 보름 동안 유예되었지요.(이런 상황에 대
고 '국민 세금 1원도 쓰지 말라'니, 변 드보르작 양반, 세금 얼마나
내는지 궁금하더군요. 아, 이 인간 이야기좀 그만해야 할 텐데...)
솔직히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도, 보름 동안 못하다가 지금 처음 하
는 겁니다. 제가 훌쩍 거렸단 사실, 저희 부인도 아직 모르거든요.
(알면서 모른 척 해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속깊은 사람이라...)    .

죄송합니다. 세번째 책이라는 의미에서 '3'이라고 적었는데,
본의 아니게 헛갈리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흑흑. 물의를 빚
어 죄송합니다. T_T 다른 책입니다.                              .

다음 주 쯤에 세 번째 책이 나올 계획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책의 탄생을 기뻐하고 싶습니다.  이명박 정권, 정말 심장
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정권인데요, 좀 한동안 사고 좀 치지않았
으면 좋겠네요. 꼭 책을 위해서라기보다, 마음 편하게 며칠 일에 집
중하면서 살고 싶답니다. 민생~민생~ 말만 하지 말고, 시민들이 생
업에 전념하게끔 내버려뒀음 좋겠어요! 고달프답니다. 잇힝.        .




by 김태 | 2009/06/08 06:09 | 미술사 | 트랙백(1) | 덧글(40)

에라스무스 (6) - 아르킬로코스적인 말, 표현의 자유


바로 저번주 한겨레 연재 올라간 글입니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조금 달랐어요. 그런데 글을 쓰는 동안에, 우리의 명박 패거리께서
인터넷 댓글까지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던 것이지요.  음. 가
만히 있으면 한 번 덜 먹을 텐데, 그걸 굳이 한 마디씩 짖으시고
을 버는 거 보면, 우리
변태 명박 각하께서는 엄청난 마조히스트
가 아닐까 싶네요. 암튼 글 마지막 부분에서 살짝 명박과 졸개들을
씹어 주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독설을 들어야해요. 그래서
들이 자기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 조금이나마 알아야해요.
아휴..


중간중간 붉은색 글씨는, 분량 맞추느라 퇴고하면서 지운 부분이에요.
연재분엔 이 부분 없지요 -  이글루스판은 일종의 감독판이랄까요. ^^


에라스무스(1466-1536)
홀바인(小)이 그린 초상



풍자와 독설, 아르킬로코스의 두 얼굴



   영화 <300>에도 나오다시피 스파르타 사람들은 영웅적인 죽음을 칭송했지요. 전장으로 나가는 아들에게 방패를 챙겨주며 스파르타의 어떤 어머니는 달랑 다섯 마디를 건넸다나요. 우리말로 옮기면 “이걸 들고 아니면 여기 실려” - 즉 싸움에 이겨 ‘방패를 들고’ 개선하든가 아니면 명예롭게 전사하여 ‘방패에 실려’ 돌아오라는 거죠. 체면 좀 구기더라도 살아서 돌아오라는 모정은 깊이 숨긴 채, 죽어도 좋으니 방패만은 놓지 말라고 하네요.

 
   고대 서양 세계에서 방패는 전사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서사시 <일리아스>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묘사하는 데 한 권을 할애할 정도입니다. 적을 죽여 방패를 빼앗는 것은 큰 명예였으므로 전사들은 그 명예를 위해 목숨을 잃곤 했습니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王과 그
의 방패 - 다비드의 그림에서

   그런데 이토록 장엄한 군국주의의 흐름을 통렬하게 풍자한 시인이 있었어요. 방패를 팽개치고 줄행랑을 놓으면서도, 살아남은 게 중요하지 그깟 방패가 대수냐며, 하나 새로 사고 말겠다던 유쾌한 양반. 그의 이름은 아르킬로코스! 최초의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어떤 운좋은 트라키아인이 훌륭한 내 방패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도망을 칠 때 그것을 숲 속에 빠뜨린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도망을 할 수가 있었다. 
                                      그까짓 방패가 무슨 대수일 것인가, 
                                      그와 같은 것을 다시 사면 그만인 것을! 
                                                                                                (번역 H.D.F.Kitto / 김진경)   [또는]
 
                        트라키아의 어떤 자가,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울창한 숲에 버리고 온, 
                        흠 하나 나지 않은 내 방패를 집어 들고 자랑스레 떠벌이고 있구나. 내 생명을
                        보존했는데, 왜 내가 그깟 방패를 걱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 방패는 이제
                        없지만, 이제 똑같이 훌륭한 다른 방패를 사면 될 것을.
                                                                                                 (원전번역 안재원)



   엄숙함이 지나쳐 숨이 막힐 때 풍자는 우리 숨통을 틔워줍니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처럼, 사회에는 따끔하게 한 방을 쏘아줄 등에가 필요하니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한다고 사회가 한목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에서처럼 ‘그 가죽 때문에 호랑이가 죽고 헛된 명예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거’라 꼬집어주는 개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러나 아르킬로코스가 근사한 사람만은 아니었대요. 그는 악랄한 독설가이기도 했습니다. 에라스뮈스는 라틴어 격언집 <아다기아>에서 ‘아르킬로코스적 발언(Archilochia edicta, 아르킬로키아 에딕타)’이란 경구를, “악의적인 표현”이라는 뜻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전설에 따르면 그의 고약한 인신공격을 견디다 못한 처갓집 식구가 자살을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랄까요. 

    시스티나 천장화에 미켈안젤로가 그려 넣은 벌거벗은 청년들은 2인1조로 무거운 청동방패를 메고 있습니다. 그 중에 방패를 놓치는 것인지 팽개치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청년이 있어서, 그림처럼 키보드 앞에 앉혀 보았더니 영락없는 ‘악플러’가 되었네요. 온유한 에라스무스가, 청년의 ‘악성댓글’에 난감해 하는군요.

  아르킬로코스의 두 얼굴은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그러나 풍자란 원래 두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닐까요. 베르그송은 <웃음>에서 웃음의 긍정적 힘을 찬양하는데, 마지막 몇 줄의 반전을 통해 ‘그러나 그 안에는 무언가 씁쓸한 맛이 있다’며 웃음이 얼마나 공격적일 수 있는지 말합니다. 나의 풍자할 수 있는 자유는 남의 독설을 들어야 하는 부담과 함께 옵니다.

                                   물론 남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표현은 제한되어야 하겠지요. 

                             똘레랑스를 위한 엉똘레랑스 -  관용을 위한 불관용이라더군요.

                             그러나 이 경우조차도 누구나 동의할 기준을 잡기 어렵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원래 이러할진대, 정말 위험한 건 독설이 아니라

                             독설을 금지하려는 행태가 아닐까요? 소통은 뒤로 하고 공권력
                                을 동원하여 댓글단 시민들까지 윽박지르는 어르신들한테 독설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요즘입니다.



by 김태 | 2008/08/03 04:05 | 고전어 | 트랙백 | 덧글(3)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