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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최근) - 작대기를 발로

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글입니다.
지면 관계상 줄인 내용은, 글 아래에 좀 적어두었어요.

역시 제목은 신문사에서 뽑아주셨는데, 참 잘 뽑아주셨습니다.
이런 건 확실히 글쟁이보다는 매체에 계시는 분이 잘 하시게 마련
입니다. 그분들은 전문가니까요. 아무튼 번번이 고마운 마음입니다.



견뎌야 할 분노, 견뎌선 안될 분노


    화가 난다고 가방을 던지거나 방문을 걷어차면 안 돼요. 낭패를 보니까요. 운 나쁘면 문지방에 발톱이 깨지기도 하지요. 더 크게 다칠 수도 있고요.


    에라스뮈스는 “작대기를 발로” 걷어찬다는 격언을 소개합니다(콘트라 스티물룸 칼케스, contra stimulum calces). 작대기를 뜻하는 라틴어 ‘스티물루스(stimulus)’는 단순한 장대가 아니라, 가축을 몰 때 쿡쿡 찌르는 뾰족한 꼬챙이라고 합니다(오늘날 영어 단어 stimulus는 ‘자극’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제 성질을 못 이겨 애먼 ‘작대기’를 발로 걷어차는 일은, 아프고 위험한 짓입니다. 각목을 차는 정도가 아니라, 각목에 박힌 못을 발로 차는 셈이랄까요, 으으.


    내 마음의 분노를 달랠 비법이 있을까요? 현대의 임상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주목합니다. 다음은 노예 출신의 현자 에픽테토스가 일러주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우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나눕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담담히 받아들일 밖에요. ‘작대기를 발로’ 걷어차 봤자, 상황만 나빠지니까요.


    예컨대 당신이 어떤 도기 그릇을 아낀다면, 그건 그냥 그릇일 뿐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깨져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당신의 아이와 배우자에게 입을 맞출 때면,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지그릇은 언젠가 깨지게 마련이고 인간은 누구나 죽는 법, 자연의 법칙은 우리 힘으론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그들이 “죽어 떠나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테니”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집착과 고통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이 생각나지 않나요?



    그림을 보세요. 에라스뮈스가 다친 전사를 간호하고 있네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상처를 싸매는 아킬레우스>를 묘사한, 그리스 도기 그림의 패러디입니다. 아킬레우스는 강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는 영웅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에 분노하고 친구의 죽음을 괴로워하며 마음 잘 날이 없었어요. 길지 않은 생애, 좀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런데 이 가르침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 시절에도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렸습니다. 주인은 그게 얄미웠던지, 팥쥐 엄마 같은 심보로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비틀어 봤대요.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분한 대답. “그러다가 다리 부러집니다.” 주인은 약이 올라 더 모질게 비틀었고 마침내 발목이 부러졌어요. 에픽테토스의 한 말씀. “그렇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글쎄요, 마음의 평정도 좋지만, 이럴 땐 벌떡 일어나 ‘들이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체념하고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항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에픽테토스의 못된 주인보다 더 밉살스럽더군요. 우리를 화나게 하려고 발목을 비트는 게 아니라, 발목을 비틀어도 항의하지 못하게 하려고 마음의 평화를 가르치니까요. 억울하게 당하는 것만도 억울한데, 억울하게 당해도 억울하지 말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시인 브레히트의 말마따나 “가난한 자에게 안빈낙도를 가르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은, 따끔하게 한 마디 타일러 줘야 하지 않을까요?



+


1. 이중톈 교수의 글이 빠져서 좀 아쉽습니다. 장량과 진평을 비교하면서
에픽테토스를 언급한 부분이 재밌어서, 글에 인용하고 싶었는데, 지면이
모자라서 못 그랬습니다. 잠시 적어두지요.

모든 학설의 운용과 실천은 이를 실행하는 사람의 개인적 이해 및 성격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유가 사상은 공자의 손에 있을 때 얼마나 생동감 넘치고 활기찼으며 봄기운이 물씬 났습니까?
하지만 강직한 명나라의 관리 해서의 손에 있을 때는 융통성 없고 경직되었으며 진부했습니다.
금욕적인 스토아학파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의 손에 있을 때는 고귀
하고 자유로우며 장엄하고 당당했으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손에 있을 때는 비참한 노예식
영웅주의로 전락했습니다. 도가 학설의 운용과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량도 황로학을 연구했으나 그의 출세 방식과 행동 양식은 진평과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진평의 스타일은 도가 고유의 특징을 극대화시킨데다 음흉함과 표독스러움을 더한 것입니다.
진평의 '기묘한 계책'이란 바로 음모와 계략이었습니다. ...(210)

에픽테토스에 대한 이런 평가에 선뜻 공감하자니, 에픽테토스 선생한테 좀 미안합니다.
그래도 내가 힘든 시절마다 도움을 주신(!) 분인데. 아무튼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

2. 처음엔
이문열 필론의 돼지에 대해 언급을 하고 싶었습니다만, 지면이 모자라 말았습니다.

중학생때 읽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떡 벌어진 소설이었는데, 사실 그때부터 이미
이문열 영감님은 요즘처럼 전락할 기미가 있던 것이지요.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요.

폭풍우가 몰아칠 때 승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요. 그럴 땐 필론처럼 잠이나 자는 게 현명할 겁니다. 그러나 행패부리는 애들과 다른 승객들이 맞서 싸울 때, 다른 칸으로 슬며시 빠져나가는 건(이문열, 필론의 돼지), 부끄러운 일입니다. 폭풍우는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말릴 수 없지만, 행패 부리는 자들한테 맞서 싸우는 건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면 해결되니까요. 그럴 때 꼬리를 빼는 것은 필론이 아니라 돼지겠지요.


그런데 지면도 모자라고, 이런 이야기하기도 좀 그래서, 이번엔 뺐습니다.
나중에 생각을 더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3. 사족.
김지하 영감부터 시작해서
이문열 영감님이나 이원복 선생을 공격하기란 참 쉬운 일이죠.
건드리면 다 급소에 건드리면 다 허점이니까요.

(참 이런 허술한 양반들이 먹히던 시절이 있었다니... 한국, 옛날엔 참 허술한 사회였군요.)

하지만 굳이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도 많아서 주저하게 됩니다.
어차피 대략 아웃오브안중이신 분들이라... 부러진 갈대 굳이 꺾는 사람이 되어 무엇하겠습니까.

나이 먹어 그런 양반들처럼 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쪽이, 차라리 건설적인 일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십년 후에 젊은 세대들이, 우리 세대를 보고 또 한심하게
생각하게 될까봐 걱정도 되거든요. 항상 긴장을 풀지 말아야죠.

좀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by 김태 | 2009/11/14 11:40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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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VP at 2009/11/14 11:51
이러다가 에라스무스 선생까지 (스트레스성) 폐암에 알콜중독에 걸리실까 걱정이 됩니다 'ㅅ';;;;;

※아 이건 사적인 얘긴데(?), 엄벅씨 글을 믿느니, (영국식) 영어를 배워서 Osprey Military History 를 정독하는 게 훨씬 믿음이 간다지요 네... 'ㅅ'
Commented by 김태 at 2009/11/14 12:00
아 그래도 Osprey는 괜찮은 책입니다요... 적어도 복식고증만큼은 참 편리하게 되어있지요. 이번 여름 유럽에서 중세 밀리터리 자료를 한 박스 사서 들어왔습니다. Osprey도 여러권... T_T
Commented by LVP at 2009/11/14 12:39
여담이지만, 보는데만 1주일이 걸리는 그 괴악한 영국식 영어의 오스프리...거땜에 처음 미국에서 영어배웠을때를 계속 각인시켜주는, 정신수양용으로도 쓸 수 있는 고마운(?) 책으로 여기던 때도...'ㅅ';;;

예전에 한번 계산해보니, 오스프리 시리즈를 사려면, 한화로 1.5억 정도를 투자해야한다는 괴악한 결과가 나와서 좌절했던 적이 있고, 지금도 좌절중....
Commented by 고어핀드 at 2009/11/14 21:45
핫핫, 김태님도 osprey를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전쟁사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osprey 책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환율이 내려가면 더 구입하려고 해요.
Commented by 김태 at 2009/11/17 11:41
홍대쪽 자료 서적 파는 곳에 다니다보니, 일본판도 꽤 있더라고요. <20세기연대기> 단행본할 때 참고하려고 '콘도루여단'이라고 된 책을 샀습니다. 비싸더군요. T_T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11/14 12:23
저는 이원복 선생에 대해서 실망을 느낀게 정치적 스탠스때문이 아니죠.(사실 저도 그쪽이랑 가까우니 ㅋㅋㅋ) 모 서적에서 데즈카 오사무를 디즈니와 비교해서 신랄하게 공격한것 때문입니다. 그 공격 이유와 이원복 선생의 과거를 본다면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죠.

ps: "1,2.3.그리고 4,5 로크"와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의 스토리를 보면 뭐 답 없음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시대의 아픔이라는 말을 해도 좋지만 그런 아픔을 가진 분이면 더더욱 데즈카 오사무를 비판할수 없는거지요. 양심이 있다면요
Commented by 김태 at 2009/11/14 12:59
저도 이원복 선생이나 이문열 영감님에 대해, 정치적 스탠스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건 아닙니다. 예컨대 도스토옙스키는 지독한 우익이었지만, 저는 그 사람은 존경합니다. 하지만... 이원복 선생은 시간이 갈 수록 너무 긴장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래 생각나는 사례를 일고여덟가지 적었지만, 제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지웠습니다.6^^;; 죄송합니다. ToT)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이야기는 주위에서 자주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기회가 닿는대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저녁놀이 at 2009/12/01 09:28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게 기독의 신이이었다지만
썩은 등걸도 발길질을 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오늘 휴전선이남에서는 더 와닿습니다...
Commented by 김태 at 2009/12/02 22:54
아! 좋은 표현이군요. 나중에 인용이라도 하려면
출처를 어떻게 밝히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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