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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21) - 옷이 날개 / 어린 왕자 / 오뒷세우스 / 단테


이번 주 한겨레 : 인터넷 판에는 사진이 크게 나와 부담스럽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0376.html
요즘 최대 화두가 글을 쉽게 쓰는 것인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왕자는 소행성 B612에 살았습니다. 이 작은 별을 발견한 터키 천문학자의 말을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대요. 국제학회에 전통의상을 입고 나갔기 때문이라죠. 그런데 이 학자가 멋쟁이 양복을 입고 발표를 하니, 그때엔 다들 믿었다나요.


       ‘옷이 날개’라는 우리네 속담이 있죠. 라틴어 격언에는 ‘옷이 사람을 만든다(vestis virum facit, 베스티스 비룸 파키트)’고 합니다. 이 말을 소개하면서 에라스무스오뒷세우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우시카아 공주(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나우시카>는 여기서 따온 이름입니다)는 바닷가에 떠내려 온 벌거숭이 오뒷세우스를 구해줬어요. 그런데 오뒷세우스가 좋은 옷을 갖춰 입고 다시 나타나자 공주는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인 줄 몰랐다’면서 크게 놀랐지요. 남몰래 연정까지 품게 됐어요.


        우리 역시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곤 합니다. 내가 평가당할 때는 억울해하면서도 말이죠.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는 온갖 역경을 이겨낸 진정한 사랑의 대명사라고들 합니다(프랑스 화가 제라르의 유명한 그림을 다시 그려보았어요). 그런데 에로스가 프쉬케에게 반한 것도, 프쉬케가 에로스에게 반한 것도, 애초에 서로의 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휴, 세상만사가 이런 식이니, 일부러 허름하게 하고 다녀 손해를 볼 까닭은 없겠죠.



스크롤의 압박! 그림이 끝나면 글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뒷세우스가 불멸의 명성을 얻은 데에는 정작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영웅들은 각자 고유한 형용사를 갖는데, 오뒷세우스의 ‘전용’수식어는 ‘많이 견디는(polytlas, 폴뤼틀라스)’라는 단어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오뒷세우스는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요컨대 옷맵시와 현실감각 때문이 아니라, 숱한 고통과 감투 정신 덕분에 우리는 ‘잘 참는 오뒷세우스’를 기억하는 겁니다.


        시인 단테는 고향에서 쫓겨나 고통스러운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그는 저승을 여행하던 중 오뒷세우스를 만났다고 <신곡>에서 노래했어요. 우리 인간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며 ‘고통을 견디는’ 오뒷세우스의 모습은 감동적입니다(‘지옥’편 제 26곡).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갇혀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유대계 지식인 쁘리모 레비는, 이 대목을 동료에게 들려주며 ‘고통을 견딜’ 용기를 얻습니다. 2003년의 어느 강좌에서 서경식 선생은 이 일화를 언급하며 “내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나는 (쁘리모 레비의) 책에서 큰 힘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         여기 언급된 쁘리모 레비의 일화를 이 글 말미에 옮겨놓았습니다.       )

        외모 역시 중요하다는 현실을 무시할 순 없겠죠. 그러나 아무리 고운 꽃미남 꽃미녀라도 에로스와 프쉬케가 숱한 고난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그저 한 때의 불장난에 불과했을 겁니다. 아무리 멋진 옷을 입었더라도 오뒷세우스가 ‘많이 견디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토호에 그쳤겠지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인간은 인간 이상의 존재입니다.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는 말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 + +


조금 깁니다만, 쁘리모레비에 대한 서경식 선생님의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가슴 뭉클한 글입니다.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서경식, 노마 필드, 카토 슈이치 공저, 이목 옮김, 노마드북스, 196-202쪽.

          당시 프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아우슈비츠)에서 '피콜로'라는 동료와 함께 밥을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 수용소에서는 영양섭취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아무리 애를 써도 보통 생활이라면 3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게다가 가혹한 강제노동을 매일 강요받았으며 자칫 사소한 규칙 하나라도 위반할 경우엔 무시무시한 고문과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발하거나 어떻게 하면 남을 속여서 그의 물건을 훔칠까, 어떻게 하면 나보다 더 약한 인간을 짓밟아 살아남을까만을 궁리하는 곳이 바로 강제수용소라는 공간이다.

        거기서 피콜로가 레비에게 '아무 시라도 좋으니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시 낭독을 부탁받았지만 수용소엔 당연히 책 같은 것이 없으므로 기억하고 있던 시를 읊조리고 있는데, 이때 레비의 뇌리에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노래'가 불현듯 스친다. <신곡>은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열심히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피콜로에게 전하려 한다. (피콜로는 프랑스계 유대인이었음.) ....


        ...프리모 레비는 이 부분을 "이봐, 피콜로! 정신을 집중해주게, 귀를 기울이고 머리를 좀 써보라고. 자네가 꼭 알았으면 좋겠어"라고 하면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친구 피콜로에게 들려주려 한다. ..



                                              그대들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스스로 이 시를 번역하고 말로 표현하던 그때의 일을, 레비는 "나 역시 이 시를 처음 들은 것처럼 느꼈다, 나팔소리, 신의 음성과 같았다. 일순,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요컨대 오디세우스가 지극히 험난했던 항해 도상에서 "이제 끝인가!"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짐승처럼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말을 듣고 피콜로에게 힘을 내라고 했던 것이다. 그 시가 강제수용소 안에 있던 프리모 레비의 뇌리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비는 그 시를 동료 죄수에게 전달하려 한다. 그리고 그때는 자신의 생명줄인 빵마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리만치 그 시에 집중했다고 한다.
...



by 김태 | 2009/04/18 05:09 | 고전어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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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디오니 at 2009/04/18 11:25
잘 봤습니다. 정말 뭉클해지면서, 뭔가 울컥하는데요. ^^
갑자기 10여 년 전에 서경식 선생의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읽었던 때가 떠오르네요. 오랜만
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ommented by 김태 at 2009/04/19 16:13
한국어로 된 책을 내시는 저자 분 중에, 서경식 선생과 박노자 선생 두 분이 가장 글을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아, 이런 아이러니가. T_T
Commented by 朴下史湯 at 2009/04/18 12:17
그리고 에미넴 선생(이 친구도 에 씨군요)의 명언도 있지요.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

.....

ㅠㅠ
Commented by 김태 at 2009/04/19 16:13
현실은 시궁창이어도 꿈은 높다...와
꿈이 높아도 현실은 시궁창...은 결국
같은 이야기겠군요.
Commented by leopord at 2009/04/19 14:44
이번 화도 어김없이 같은 사진이군요.ㅎㅎ;;

불의 앞에서도 참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불의라니 왠지 낯간지럽습니다만;;), 참기 힘든 고통을 참는 데에 인간의 가치가 있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옷이 날개인가요.orz
Commented by 김태 at 2009/04/19 16:18
실은 저 사진을 편집부에서는 의외로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았어요...OTL
대체로 저보다 손윗분들은 저 사진을 좋아하시는 분위기고요, 제 또래에서는
부담스럽다는 분위기인데요... 저는 솔직히 멋있는 모델처럼 나오면 제일 좋
겠습니다만(퍽! 으악!) 그건 본판에 무리가 있는지라.. T_T
이러니 저러니 옷이 날개라는 것에 저 역시 좌절합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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