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0일
에라스무스 (9) - 고통 앞의 인간
"너 무슨 일있냐?" "아닌데. 왜?" "신문보고 무슨 일 있는 줄로 알았다."
지난 토요일에 있던 대화입니다. 친구 윤선생과 전화 통화 중에, 이번
신문글이 너무 어두워서 무슨 일인가 했다고 하네요."별일 없는거지?"
아. 원래는 지난 주말에 실릴 글이었는데,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 한주
늦춰진 것이었습니다. 지난주 지지난주에는 한국사회에 우울한 일이 워
낙 많았지요. 톱스타가 자살하고(정말 충격받았습니다) 그걸 두고 하이
에나 같은 여당 것들이 달려들어 찌질대고,그런와중에 주가는 지옥으로
환율은 달나라로. 명박과 만수의 개념 역시 환율을 따라서 저 머나먼 안
드로메다로. 그걸 지켜보는 국민들의 어이는 우주로, 희망은 지옥으로.
뭐 저부터도 뉴스보다가 우울하던 시즌이라서, 우울하고 슬픔에 대한 글
을 써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한 주 늦춰지면서, 핀트가 약간 어긋난듯.
고통 앞의 인간
불로써 확인된 황금
Aurum Igni Probatum 아우룸 이그니 프로바툼

때로 슬픔이 몰려옵니다. 반 고흐의 편지처럼, “불행이 나만 따로 비켜가지는 않으니까.”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것 같고 세상이 나를 적대하는 것 같고, 마침내 시인 백석의 말처럼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다가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불로써 확인된 황금’(아우룸 이그니 프로바툼, aurum igni probatum)이라는 라틴어 격언을 전합니다. 고통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불 속의 황금에 비유한 것이지요. “황금은 불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으며 도리어 더 아름답게 빛난다. 진실로 선한 사람들은 불운 속에서도 제 성격을 잃지 않으며 오히려 어둠 속의 빛처럼 반짝인다”고 그는 썼습니다.
로 번역된 사연도 매우 심란하지요.
중국 명나라 때의 과학기술서 <천공개물>은 불 속의 황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용광로의 은에 풀무질을 하면 불똥이 한번 일었다 사라질 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오로지 황금만이 풀무질을 할 때마다 불똥이 튀며, 세차게 할수록 더 거세게 불꽃이 이는 것이다. 금이 귀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은은 고온에서 녹이 슬어 그 빛을 잃지만, 금은 잘 산화하지 않기 때문이라나요. 그림 아래쪽 풀무질하는 모습은, <천공개물>에 실린 옛 판화를 본뜬 것입니다.

위쪽 청년의 모습은 케테 콜비츠의 전쟁 반대 판화에 보입니다. “평화를 외치던 친구의 무덤을 / 군화가 짓밟으며 간다”고 시인 브레히트가 노래한 것처럼, 20세기 초반만 해도 반전 운동은 목숨 내놓고 하는 일. 1차 대전을 반대하던 리프크네히트가 전후의 혼란 속에 살해되자, 콜비츠는 그의 추모 판화를 제작합니다. 시련의 불구덩이 속에서도 신념을 지킨 사람들은 아름다운 빛으로 남습니다.

http://www.spartacus.schoolnet.co.uk/GERliebknecht.htm
저는 google에서 이 페이지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한편 고통은 때로는 차가운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글쎄요, 뜨거운 탄압이 더 괴로운지 차디찬 무관심이 더 서러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침묵 속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우정의 증표”라는 사실은 확실하겠지요. 20세기 남미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스 신부의 말입니다.
19세기 조선의 김정희는 멀리 유배를 떠납니다. 높은 벼슬에 있을 때 살갑던 주위 사람들은 찬 서리를 맞은 듯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시기에 옛 제자 이상적은 여러 해 동안 그를 챙겼고,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려 선물합니다. ‘세한(歲寒)’ 즉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지요.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논어> 자한편) 뜨거운 불길 속에서 황금이 번쩍이듯, 차가운 눈 속에서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른빛을 뿜습니다.

이고 읽었습니다.아름다운 시에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큰 고통도 사위게 마련.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나는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에” 겨울의 끝을 기다리며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해 봅니다. (백석,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넣지 못하였지만, 구스타보 구띠에레즈 신부의 '욥에 관하여'에 대해 쓰
고 싶었어요. 이 책의 지은이 구띠에레즈 신부는 (본문에도 나오다시피)
남미해방신학을 하시는 분이고, 이 책의 부제는 '무고한 자의 고통과 하
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의 표지엔
콜비츠의 석판화가 이용되고 있어요. 10년 전, 주석을 달아가며 천천히
읽던 책이었습니다. 음. 나중에 이 책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요. 아
무튼 일단 지금은 굳고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버텨보도록합시다.
# by | 2008/10/20 11:07 | 고전어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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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 스탈린은 정적을 죽인 다음 사진에서 다 오려내고,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사진을 깜쪽같이 조작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칼과 가위로 포샵질을 한 셈입니다. 숙청이 진행되면서 단체사진이 그룹사진 되고, 나중에는 두 사람 사진, 독사진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20세기 후반 독재정권들은, 정적을 제거한 다음 사진에서 오려내고, 그 빈자리를 메우지 않았다는군요. 사람이 있던 자리를 비워 놓은 채, 엉성한 구도의 사진을 내버려둔 겁니다. 단체사진에서 자리 몇 개가 듬성듬성해지고 어색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아는 거죠. 아, 저기 아무개가 있을 자리였는데. (심지어 알바니아에서는 몸과 얼굴만 지우고 구두를 내버려 둔 사진도 있더군요.)
지워진 채 채워지지 않은 그 여백의 자리야말로, 해골의 눈자리가 비어있는 것처럼 공허하게 우리를 응시합니다. 그래서 지워진 뉴스의 자리가 더 섬찟하게 다가오는군요. 이명박과 그 추종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요.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힘들 때 읽으면 조그만 목소리로 제게 힘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유종호 교수는 이 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력한 인간의 의지를 깨닫고 운명의 힘에 항복한 그는 비애와 영탄을 여과하여 체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암벽에 외로이 서서 눈을 맞고 있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살기를 다짐하는 것이다.'
유종호 교수님의 "비애와 영탄을 여과"한다는 말을 보니, 뭐랄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는 어떤 종교적인 심성같은 것이 있죠. 특정종교가 아니라, 종교일반의 느낌이랄까요.
옛날에 산간지방의 폐교를 여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위에 나무도 없고 다들 야트막한 풀 뿐이더군요. 그때 갑자기 저 멀리에 거대한 집채만한 나무 한그루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아.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손을 모으게 되더군요. 아마 각국 신화에 나오는 세계수(世界樹)라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만난 후배의 손에도 백석시집이 들려있더군요. 모처럼 휴가 중에 백석을 읽고 있던 모양입니다.
십자군 이야기 2권까지 샀었는데, 그 이후로 나오질 않는군요 ㅇㅅㅇ)a 언제쯤 다음을, 그 끝을 볼 수 있을까요... 연재중이셨던 4권분량인가? 그쪽도 인터넷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1차 십자군전쟁 종결까지라도 출판을 orz
힘내시고 좋은 만화 부탁드립니다 '')/
십자군3권은... 좀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제가 대학원 진학까지 하느라 지체되었습니다. 작업해놓았던 원고도 엎고 새로 3권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법 진행하였고요... 원래는 이 블로그 역시 십자군 작업의 현황을 알리고자 개설한 것이었답니다. 수시로 소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부터 십자군3권 현황을 좀 올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