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글루스 | 로그인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다음은 옛날에 어디 실었던 글입니다.
[대학신문] 칼럼 필진을 잠깐 했는데
그때 서경식 선생님 책을 한참 열심히
읽을 무렵이었습니다.(쁘리모 레비...)


이 그림은 아래 글에 나오는 대로...폴뤼페모스를
오뒷세우스가 찌르는 장면입니다.   
theoi.com
 
이라는 유익한 사이트에서 빌린 도기 그림이지요.

 



그 15분

 



   큰일이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 마치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당신을 잊을 수 있다는 듯이. 당신을 보면 내가 너무 괴로우니까.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당신의 시선을 모른 척한다. 당신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나는 자꾸만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일하지 않아서 비정규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일하기 싫어서 실직자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현명하지 못해서 폭력에 희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불편함에 가슴이 탄다. 나는 당신에게 떨어진 그 고통이 너무나 두렵다. 당신이 인간일진대, 나와 같은 인간일진대, 그 고통은 어쩌면 나에게 떨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사람을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오뒷세우스에게 달콤한 은전을 베풀었다. 오뒷세우스를 동료들 가운데 가장 늦게 잡아먹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동료들과 함께 폴뤼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동굴을 탈출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영악한 폴뤼페모스는 당신과 나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시장 원리’에 따라 잡아먹는 순서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당신도 나도 서로 늦게 잡아먹히기 위한 ‘자유 경쟁’에 돌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수의 딜렘마’일 따름이다. 외면이 아니라 해결을 원한다면 수인(囚人)들 모두가 힘을 합쳐 폴뤼페모스를 찌르면 그만일 것을.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한다. 내가 거대담론에 혹하여 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얌체같이 자신의 몫을 챙길 것이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배신당하고 싶지 않다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함께 갇혀 있던 폴뤼페모스의 동굴은 신자유주의의 나생문(羅生門)이 되어 버렸다. 나는 나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다면서 당신의 고통을 외면하고자 한다. 동굴 깊은 하계로 끌려 들어가는 당신의 운명을 애써 모른 척하며, 아주 약간이나마 나은 몫을 챙기고자 한다. 이렇게 나는 가해자의 편에 서서 당신을 배신한다.







   죽음은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어디서나 그러하듯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도, 아래에 짓눌린 사람들이 가장 먼저 희생당한다. <치클론B>가 바닥에서 승화하여 독가스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갇힌 사람들끼리는 주먹다짐을 벌인다고 했다. 서로 조금이라도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힘센 사람들은 약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그 위에 층층이 올라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가스실 안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다가온다. 그 시간은 대략 15분.


   그렇다. 나는 운이 좋았다. 사람을 잡아먹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내게 베푼 은전(恩典)은 바로 당신에게서 빼앗은 15분이다. 그러나 그 15분 동안 동굴 안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울부짖는 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 뿐. 당신을 외면하면 내가 편해질까? 그 15분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by 김태 | 2008/02/27 03:13 | 글그림 | 트랙백(1) | 덧글(8)

트랙백 주소 : http://kimtae.egloos.com/tb/146330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indie's 실험실 at 2008/02/28 15:28

제목 : 요즈음... 나의 화두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요즈음 내가 고민하는 것, 거의 그대로다.재산을 늘리고, 돈을 좀 더 많이 벌고,그러기 위해서 내가 하는 일은 마케팅이 되겠지만,사실 그건 자본주의 사회가 풍요로워 보이도록 하는 주범...- 빈곤을 합리화하고, 소비를 부추기고, 양극화를 더 극대화하는 - 이기 때문이다....내가 좀더 안정되고 나서는,그들을 돌아볼 수 있을까?그래도 될까?그땐 이미 너무 늦는 것은 아닐까?...15분...이라....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more

Commented by imjohnny at 2008/02/28 01:51
대학신문에서 보고 감동해서 스크랩까지 했던 글인데 이글루스에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갑네요.
작가님의 거의 모든 책을 읽은 팬입니다 ^^
『십자군 이야기』다음 권 빨리 부탁 드려요 ㅎㅎ
Commented by 드라구노프 at 2008/02/28 02:08
오오, 김태님도 이글루스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Commented by 걸배 at 2008/02/28 08:28
굉장히 의미있는 글입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네요.
Commented by hawk at 2008/02/28 11:06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이네요~~^^잘읽었습니다~~~
Commented by 훗사과 at 2008/02/28 16:54
아 짧지만 강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眞レイアン at 2008/02/28 21:28
저런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합니다(…)
Commented by 용회 at 2008/02/29 12:06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88만원 세대인 저로써는 이미.. 마음을 먹었습니다.

싸워 이기기로.

브레이브하트의 윌리엄 월레스처럼,, 싸우다보면 동료들이 붙겠죠.

안붙으면 어쩔 수 없고..
Commented at 2008/03/01 01:18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